Beyond MEDIA

2012

Ontology or Impossibility

소리는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 예술이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자연의 메시지다 . 다시 말해서 진동은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 - 중략 - “어디까지 미술이고 무엇이 미술이다 . ” 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 버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 미술 , 예술은 어디를 보아도 그 위치는 중간영역인데 그 것을 생산하는 나 자신은 과연 어디에 기울어져 있을까 ? 당연히 내가 설 위치도 관찰자의 위치 , 중간자의 위치여야만 한다 . - 작가의 작업노트

 

정만영은 포크레인으로 거대한 회화작업을 하거나 무거운 추를 달아 중력을 이용한 드로잉을 하기도 하였다 . 몇 년 전에는 도시의 건물을 하나하나 캐스팅해서 가상의 도시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 최근에 작가는 소리에 깊이 천착하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 가령 산복도로의 소리지도를 만드는 작업이나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사운드 포토'와 같은 작업에서 이러한 관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 작가는 문명과 자아의 심각한 불일치를 탐색하거나 인위적인 환경과 자연과의 대립적인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 그런면에서 정만영의 작업이 가지는 스펙트럼은 매우 넓어 보인다 . 이는 자신이 언급했듯이 예술가의 자아를 일종의 매개로서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는 그의 작업관에서 이미 예정된 것이기도 하다 .

이번전시에서 작가는 일련의 ‘사운드 포토'작업을 선보인다 . 작가는 과거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근대작가인 ‘게이아미'의 작품을 보며 공감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 폭포를 그린 그의 작품에서 작가는 소리를 경험한다 . 흔히 공감각의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감각의 분화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태아가 자궁에 있을 때 감각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

교차연결 (Cross-wiring) 되어 있는 감각은 뇌가 성장하면서 각각 독립된 감관영역을 형성한다 . 공감각현상이 성인보다는 어린이나 유아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 특이한 점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공감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일반인들에 비해 8 배정도 많다고 한다 . 칸딘스키와 랭보 리스트 등은 공감각을 소유했던 인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모티브로 ‘사운드 포토'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했다 . 이 작품들은 단순히 그림에 배경음악을 입히는 수준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 소리는 기본적으로 진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 진동의 매개에 따라 소리는 당연히 달라진다 . 그래서 소리는 물질이 아니라 그저 파동일 뿐 이다 . 작가의 사운드 포토에서 사진은 진동을 매개하는 물질이 되고 그 떨림에 의해 소리가 전달된다 . 어떤 작품은 액자가 매개가 되고 어떤 작품은 사진인화의 소재에 따라 소리의 성질이 다르게 드러난다 . 제주의 정방 , 천지연 폭포나 설악의 비룡 , 용소 , 육당 폭포에서 채집된 사운드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시각과 청각이 하나로 조합된 작품을 보여준다 .

정만영의 작품은 소리의 근원을 사유하게 만드는 탁월한 힘을 가지고 있다 . 우리가 듣는 모든 소리는 떨림이다 . 물과 물이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 , 나뭇잎들이 바람에 떨려 나는 소리 , 관광객의 목청이 울려 나는 소리 등 다양한 사운드 레이어들이 하나의 소리를 형성 한다 . 작가는 소리 그 자체에만 주목했던 우리에게 소리의 근원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 파르르 떨리는 사진이나 액자를 통해 울려나오는 이 다양한 소리들은 이미지와 함께 오버랩되면서 새로운 상황을 연출한다 .

작가의 태도는 매우 중립적이다 . 현장을 찍고 녹음하는 과정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작가가 고안한 특수한 장치에 이미지와 사운드가 올려지면 작품은 전혀 새로운 문맥을 형성한다 . 그런 면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물리적인 결합 정도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협소하다 . 작가는 채집한 소리를 진동으로 변환하여 이를 현장을 찍은 사진이나 액자를 매개로 다시 우리에게 들려줌으로써 하이퍼리얼한 현실을 제시한다 . 이 상황은 현실의 상황과 전혀 무관한 새롭게 창조된 또 다른 현실이다 . 그런 면에서 정만영은 감각을 넘어서는 ‘실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 비록 우리가 이 감각으로 삶을 기억하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작가는 그 너머를 꿈꾼다 . 그래서 작가의 작품 중에 소리만 있는 텅 빈 액자는 감각의 저편을 상징하는 비어있는 공간이다 . 이 공간을 통해 작가는 ‘진실'이란 말해질 수 없는 , 이미지화 할 수 없는 , 그리고 소리로 들을 수 없는 곳에 있음을 나지막이 말하고 있다 .

큐레이터 .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이영준

 

 

   
 

 

 

   
   

미디어 인스톨레이션 프로젝트 [Sight & Sound]
일시:2013년 6 월 21 일 (6 월 21 일 ? 7 월 21 일 )
갤러리움 3F E-Space Project

문화나눔공간 3 층의 창고로 사용하던 공간 (e-space) 에서 갤러리움 기획 프로젝트로 미디어 설치전시를 열게 됩니다 . 이 설치전시는 부산에서 미디어와 사운드 , 인터엑티브 설치등 제 각각의 방식으로 작업한 과정과 사운드 작품을 실험적으로 선보이게 됩니다 . 주로 소리를 소재로 작업해 오던 아티스트들의 오픈 스튜디오의 개념으로 작업의 과정과 흔적이 동시에 이 공간에서 전개 되며 작업과정과 장비가 동시에 전시 , 설치 됩니다 . 시각예술과 현대음악이라는 분리된 영역에서 작업하던 아티스트들의 작업들을 공개적으로 동시에 설치하여 기존의 창고 공간이라는 거친 환경에서 상호 교차하는 독특한 실험과 충돌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취지 입니다 . 제각각 색깔과 실험적 방법론으로 모두가 나름의 시도를 하고 있는 작업들이지만 , 또한 시각과 함께 소리를 주로 다루는 접근방법으로 동시대의 기술적 프로세스를 담아내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공통의 접점을 찾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특히 기성의 예술적 카테고리를 벗어난 포멧의 창조적인 기술적 과정의 작업들이 부산에서 시도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 갤러리움의 비어있는 공간 (empty space) 이 하나의 공간적 캔버스가 되어 자유로운 프로세스를 불어넣는 매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

설치작가 - 김현명 / 심준섭 / 정만영 / 김태희

1. 김한밀 연주 최윤영 ( 국악 ) / 도희수 (DJ) / 곽인재 ( 사운드에펙 )

2.이동관 3 _ 주창권 4_ 이승일

정만영 / Sound-photo 2 ? 너무나 열정적인 뇌

정만영은 직접 채집한 현장음 소리를 사용하고 이를 요소로 사진 , 영상 , 오브제와 함께 다루는 작가이다 . 그는 도시와 자연을 오가며 직접 녹음한 사운드를 활용하여 그 현장의 공간을 몇가지 창지와 함께 전시장으로 옮겨 온다 . 현장의 기계적으로 재현된 몇가지 요소를 통해 현실의 공간은 관객들에게 인식의 파편화된 꼴라쥬로서 또한 미술품으로서 재맥락화되고 있다 . 이러한 설치행위는 우리에게 기억의 저장소로서 소리 , 시각 , 또한 기술적 과정을 느끼게 해준다 . 작은 스피커와 사진과 오브제를 통해 작가가 어떠한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완전하지 않다 . 작가는 장소가 지닌 불완전한 기억의 요소로서 설치와 소리를 다룬다 . 그러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옮기고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불완전한 기억의 과정들은 미술적 이미지로 다시금 그려진다 . 우리의 뇌의 활발한 작용을 은유하기도 하고 장소의 변형을 통한 경험의 흔적같기도 하다 . 정만영의 작업은 기억의 회로를 설치물로 그려내면서 우리의 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요소를 새롭게 지각하기를 원하는 듯 하다 .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운드 작가들의 영상을 제작하여 디스플레이 하게 된다 . 직접 촬영한 소스를 주로 사용하여 사운드 작업과 병치하여 작업한 영상을 공간에 설치하였다 . 영상은 세개의 채널로 이루어져 있고 세명의 사운드 작곡가의 작품이 이를 통해 순차적으로 플레이 된다 . 영상은 음악의 시각적 질감을 연상하여 제작되었고 음악 작곡가가 직접 영상 소스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 미디로 제작된 음악적 특성에 맞게 사진이나 영상은 디지털로 재가공 되었다 . 영상은 디지털처리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특한 색채감과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이가 공간과 사운드를 캔버스 삼아 전개 되면서 공간이나 경험의 비논리적 상황을 유도하게 된다 . 이는 우리가 공간에서 느끼는 인상의 시적 특성을 부각하여 우리의 일상 공간을 더욱 더 생격한 미술적 장으로 확장하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 .

김현명

 

 

 
 
 
   

틈을 위한 고된 걸음

― 2006 정만영 개인전에 부쳐

 

김만석 ( 미술평론가 )

자연은 대도시의 콘크리트 속에 가려진지 오래되었다 . 대도시는 자연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위압적으로 전달해왔거나 폭력적으로 자연을 짓밟음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 좀더 확실하게 말하면 , 자연은 가려진 게 아니라 대도시 덕택에 완전히 인간의 삶 외부로 몰려나 버렸다 . 자연은 인간이 동화되거나 조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도시적 삶을 영위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취급되기만 했던 것이다 . 도로를 놓고 건물을 올리려면 울퉁불퉁한 자연물은 마름질하고 자연이 솟아나거나 돋아나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봉쇄해야만 한다 . 자연이 새어나올 ‘틈'도 없이 대도시는 자연을 철저히 인공적으로 봉합해버린다 .

하지만 생태적 위기 혹은 환경 위기가 거론되는 즈음의 상황에서 대도시는 자연을 불러들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실정을 목격할 수 있다 . 문제는 최근 대도시의 행정과 정책은 도시에 자연을 불러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 그렇게 불러들이려는 자연은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 인공적인 현실에 보다 가까워보인다는 데에 있다 . 이미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대도시에 걸맞는 자연 현실만을 요구할 뿐이지 자연 그 자체가 대도시 속으로 개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연이 풍경이 되지 못할 때 자연은 또 다시 죽거나 사라져야만 하는 현실이 도래한 셈이다 . 자연을 대도시 속에 함축하려 하지만 대도시만 있고 자연은 다시 말끔한 풍경 뒤로 숨어버린다 .

정만영 의 작업이 지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대도시에 의해 붕괴된 자연적 현실이다 . 물론 정만영 은 자연물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는 않는다 . 다만 자연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위해서 자연물 자체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자연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했다 . 자연을 전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만영 이 보기에는 온당하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구성한 자연 역시 풍경으로 , 아니 후경화될 공산이 더 크다는 것이 자명하지 않는가 . 이 때문에 그가 주요하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도시의 인공적 마름질을 뚫는 ‘틈'이다 . ‘틈'은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사실 중요한 개념으로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

그런데 초기에 그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틈'이 근본적이지 않았고 다만 작업을 구성하는 데에 보조적인 층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 정만영 에 의해 구성된 초기의 작업들은 관람객에게 ‘틈'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 가령 , < 태백산 기행 > 은 태백산을 자체로 제시하지 않고 그 속을 텅 비워두는 방식으로 통해 우리가 목격해야 될 것이 발로 밟는 산이 아니라 산 내부에 잠복한 , 비가시적인 산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즉 , 산은 자연적 현실일 수 없고 산이라고 명명하는 일상적 지각이 지시하지 않는 상태가 자연 자체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이 산행이라는 문화에 침윤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산과 만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

이 개인전보다 더 이전으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보자 . 정만영 은 학부시절에 나무를 조형하는 작업에 집중해 있었다 . 정만영 에게 ‘나무'는 자신의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한 중요한 매재 ( 어쩌면 매재는 항상―이미 매체일 수 있다 ) 였다 . 물론 매재에 불과하지만 정만영 에게 나무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데에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 나무를 깎으면서 작가는 나무의 본성을 포착하려 했고 그것은 작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주제의식과 곧바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 정만영 에게 ‘나무'는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나무'가 아니라 지각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나무'를 만나는 과정에 다름없었다 .

그 때의 작업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포착하려는 주제의식의 기원처럼 보는 것은 지나친 견해일 수도 있다 . 주관적인 주장에 불과하겠지만 , 종종 작가가 건물을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자연과 함께 있는 장면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처럼 학부시절의 작업이 작가에게 ‘자연'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사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추론하자면 , 정만영 에게 중요한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라지려는 매체들을 집요하게 붙들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힘들이 어디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를 점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 요컨대 , 나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무가 일깨운   ‘틈'을 포착하려는 태도가 이 시기 작가의식에 녹아 있었던 셈이다 .

물론 그렇다고 정만영 이 사용하는 매재가 고리타분하거나 오래된 전통적 매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 지워진 시간과 도래하는 시간들 간의 교섭을 < 새로운 물결 > 과 같은 작업에서 실현해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의 시간으로 모든 것을 수렴해버리는 폭력적 현실에 틈을 벌리는 ‘매재'가 실상 중요했던 셈이다 . 그것이 나무였던 것이고 그가 지금까지 작업을 진행하는 데에 무의식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라는 말이다 . 한편으로 최근 부산지역의 젊은 작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내려는 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

여하튼 사진과 비디오 , 입체를 관통하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도 ‘나무'에서처럼 ‘틈'인 것은 분명하다 . 일군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정만영 이 이 주제의식 즉 ‘틈'에 깊이 개입해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의식에 그가 접속해 있음을 상기하게 해 준다 . 사물은 초단위로 낡아가고 있으며 더 빠르게 시간의 지층 속에 파묻혀 버리고 있는 시대의 폭력적인 시간에 ‘틈'을 벌리거나 시간을 찢고 나오는 ‘자연'을 표현하려는 것은 잃어버린 근원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양한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틈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

이번 개인전에서 정만영 은 지금까지의 이루어왔던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정만영 의 < 하얀 숲 > 연작은 대도시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대지와 공중을 장악하는 무시무시한 현실을 평화롭게 표현해주고 있다 . 평화롭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서둘러 아픔을 불러들이면서 이 평화로운 관조를 뒤흔든다 . 석고로 제작된 건물들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대지와 공중을 압박하면서 아주 미세한 틈만을 남겨두고 장악해버리기 때문이다 . 사라져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을 짐작케 하면서 , 손쉽게 ‘애도'와 ‘망각'에 성공하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충격을 주려는 전략으로 비춰진다 . < 하얀 숲 > 연작에 일부만 남아 있는 한 평 남짓한 ‘자연'이 열어 놓은 ‘틈'이 이전의 작업과 다른 방식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즉 , 정 만영 은 < 하얀 숲 > 연작에서 지금까지 이뤄냈던 성과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경로를 얻어냈다는 말이다 . 정만영 의 이전 작업이 틈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기보다 부수적인 장치로 사용했다면 < 하얀 숲 > 연작은 틈 자체를 핵심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대도시의 환경을 부수적인 것으로 배치해둔다 . 이로써 ‘틈'이 우리 현실의 핵심적인 층위에 있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한다 . 자연을 예찬하는 방식이 인간의 입장에서 고려할 때에나 가능하다면 , 정만영 이 도달한 것은 인간의 입장에 누수를 일으키고 도리어 ‘입장'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연' 혹은 ‘틈'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만영 에게 대도시는 여전히 ‘틈' 혹은 ‘공백'을 남겨둘 수밖에 없다 . 사실 앞서 ‘자연'이 대도시의 공간을 뚫는다고 했지만 , 그것은 뚫는 게 아니라 대도시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없어서 이미 ‘틈'이 벌어져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 아무리 철저하게 모든 것을 뒤덮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절대로 대도시 내부로 안착할 수 없는 ‘틈'이 처연하게 자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비록 자연은 대도시의 ‘틈'으로써만 존재하겠지만 , 그 틈은 대도시의 절대적 위용을 무력화하는 위력을 더더욱 강력하게 발산할 터이다 . 정만영 의 작업에서 자연물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가 ‘나무'를 작업의 요소에 끊임없이 가져다 놓는 것처럼 , 대도시 곳곳에 ‘틈'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 아니 , 대도시는 점점 쩍쩍 갈라져야만 한다 . 아 , 그 ‘틈'에서 늦도록 그와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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