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위한 고된 걸음
― 2006 정만영 개인전에 부쳐
김만석 ( 미술평론가 )
자연은 대도시의 콘크리트 속에 가려진지 오래되었다 . 대도시는 자연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위압적으로 전달해왔거나 폭력적으로 자연을 짓밟음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 좀더 확실하게 말하면 , 자연은 가려진 게 아니라 대도시 덕택에 완전히 인간의 삶 외부로 몰려나 버렸다 . 자연은 인간이 동화되거나 조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도시적 삶을 영위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취급되기만 했던 것이다 . 도로를 놓고 건물을 올리려면 울퉁불퉁한 자연물은 마름질하고 자연이 솟아나거나 돋아나는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봉쇄해야만 한다 . 자연이 새어나올 ‘틈'도 없이 대도시는 자연을 철저히 인공적으로 봉합해버린다 .
하지만 생태적 위기 혹은 환경 위기가 거론되는 즈음의 상황에서 대도시는 자연을 불러들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실정을 목격할 수 있다 . 문제는 최근 대도시의 행정과 정책은 도시에 자연을 불러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 그렇게 불러들이려는 자연은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 인공적인 현실에 보다 가까워보인다는 데에 있다 . 이미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대도시에 걸맞는 자연 현실만을 요구할 뿐이지 자연 그 자체가 대도시 속으로 개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연이 풍경이 되지 못할 때 자연은 또 다시 죽거나 사라져야만 하는 현실이 도래한 셈이다 . 자연을 대도시 속에 함축하려 하지만 대도시만 있고 자연은 다시 말끔한 풍경 뒤로 숨어버린다 .
정만영 의 작업이 지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대도시에 의해 붕괴된 자연적 현실이다 . 물론 정만영 은 자연물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지는 않는다 . 다만 자연을 그 자체로 드러내기 위해서 자연물 자체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자연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했다 . 자연을 전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만영 이 보기에는 온당하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구성한 자연 역시 풍경으로 , 아니 후경화될 공산이 더 크다는 것이 자명하지 않는가 . 이 때문에 그가 주요하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대도시의 인공적 마름질을 뚫는 ‘틈'이다 . ‘틈'은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사실 중요한 개념으로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
그런데 초기에 그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틈'이 근본적이지 않았고 다만 작업을 구성하는 데에 보조적인 층위에만 머물러 있었다 . 정만영 에 의해 구성된 초기의 작업들은 관람객에게 ‘틈'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 가령 , < 태백산 기행 > 은 태백산을 자체로 제시하지 않고 그 속을 텅 비워두는 방식으로 통해 우리가 목격해야 될 것이 발로 밟는 산이 아니라 산 내부에 잠복한 , 비가시적인 산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즉 , 산은 자연적 현실일 수 없고 산이라고 명명하는 일상적 지각이 지시하지 않는 상태가 자연 자체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이 산행이라는 문화에 침윤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로서 산과 만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
이 개인전보다 더 이전으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보자 . 정만영 은 학부시절에 나무를 조형하는 작업에 집중해 있었다 . 정만영 에게 ‘나무'는 자신의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한 중요한 매재 ( 어쩌면 매재는 항상―이미 매체일 수 있다 ) 였다 . 물론 매재에 불과하지만 정만영 에게 나무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구현하는 데에 가장 정확한 것이었다 . 나무를 깎으면서 작가는 나무의 본성을 포착하려 했고 그것은 작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주제의식과 곧바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 정만영 에게 ‘나무'는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나무'가 아니라 지각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나무'를 만나는 과정에 다름없었다 .
그 때의 작업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포착하려는 주제의식의 기원처럼 보는 것은 지나친 견해일 수도 있다 . 주관적인 주장에 불과하겠지만 , 종종 작가가 건물을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자연과 함께 있는 장면이 훨씬 잘 어울리는 것처럼 학부시절의 작업이 작가에게 ‘자연'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사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추론하자면 , 정만영 에게 중요한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라지려는 매체들을 집요하게 붙들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힘들이 어디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를 점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 요컨대 , 나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무가 일깨운 ‘틈'을 포착하려는 태도가 이 시기 작가의식에 녹아 있었던 셈이다 .
물론 그렇다고 정만영 이 사용하는 매재가 고리타분하거나 오래된 전통적 매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 지워진 시간과 도래하는 시간들 간의 교섭을 < 새로운 물결 > 과 같은 작업에서 실현해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의 시간으로 모든 것을 수렴해버리는 폭력적 현실에 틈을 벌리는 ‘매재'가 실상 중요했던 셈이다 . 그것이 나무였던 것이고 그가 지금까지 작업을 진행하는 데에 무의식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라는 말이다 . 한편으로 최근 부산지역의 젊은 작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드러내려는 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
여하튼 사진과 비디오 , 입체를 관통하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도 ‘나무'에서처럼 ‘틈'인 것은 분명하다 . 일군의 젊은 작가들과 함께 정만영 이 이 주제의식 즉 ‘틈'에 깊이 개입해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의식에 그가 접속해 있음을 상기하게 해 준다 . 사물은 초단위로 낡아가고 있으며 더 빠르게 시간의 지층 속에 파묻혀 버리고 있는 시대의 폭력적인 시간에 ‘틈'을 벌리거나 시간을 찢고 나오는 ‘자연'을 표현하려는 것은 잃어버린 근원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양한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보다 다양한 틈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
이번 개인전에서 정만영 은 지금까지의 이루어왔던 작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정만영 의 < 하얀 숲 > 연작은 대도시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대지와 공중을 장악하는 무시무시한 현실을 평화롭게 표현해주고 있다 . 평화롭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서둘러 아픔을 불러들이면서 이 평화로운 관조를 뒤흔든다 . 석고로 제작된 건물들은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대지와 공중을 압박하면서 아주 미세한 틈만을 남겨두고 장악해버리기 때문이다 . 사라져버리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애정을 짐작케 하면서 , 손쉽게 ‘애도'와 ‘망각'에 성공하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충격을 주려는 전략으로 비춰진다 . < 하얀 숲 > 연작에 일부만 남아 있는 한 평 남짓한 ‘자연'이 열어 놓은 ‘틈'이 이전의 작업과 다른 방식으로 여겨지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즉 , 정 만영 은 < 하얀 숲 > 연작에서 지금까지 이뤄냈던 성과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경로를 얻어냈다는 말이다 . 정만영 의 이전 작업이 틈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기보다 부수적인 장치로 사용했다면 < 하얀 숲 > 연작은 틈 자체를 핵심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면서 대도시의 환경을 부수적인 것으로 배치해둔다 . 이로써 ‘틈'이 우리 현실의 핵심적인 층위에 있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는 논리를 마련한다 . 자연을 예찬하는 방식이 인간의 입장에서 고려할 때에나 가능하다면 , 정만영 이 도달한 것은 인간의 입장에 누수를 일으키고 도리어 ‘입장'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연' 혹은 ‘틈'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정만영 에게 대도시는 여전히 ‘틈' 혹은 ‘공백'을 남겨둘 수밖에 없다 . 사실 앞서 ‘자연'이 대도시의 공간을 뚫는다고 했지만 , 그것은 뚫는 게 아니라 대도시가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없어서 이미 ‘틈'이 벌어져 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 아무리 철저하게 모든 것을 뒤덮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절대로 대도시 내부로 안착할 수 없는 ‘틈'이 처연하게 자리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 비록 자연은 대도시의 ‘틈'으로써만 존재하겠지만 , 그 틈은 대도시의 절대적 위용을 무력화하는 위력을 더더욱 강력하게 발산할 터이다 . 정만영 의 작업에서 자연물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그가 ‘나무'를 작업의 요소에 끊임없이 가져다 놓는 것처럼 , 대도시 곳곳에 ‘틈'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 아니 , 대도시는 점점 쩍쩍 갈라져야만 한다 . 아 , 그 ‘틈'에서 늦도록 그와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